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삯바느질

바짝이 2024. 2. 1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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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회에서 여성들이 갖추어야 할 4가지 덕, 즉 四德은 부덕(婦德), 부언(婦言), 부용(婦容), 부공(婦功)이었다. 부덕은 마음씨라 하겠고, 부언은 고운 말씨를, 부용은 곱고 단정한 용모를, 부용은 솜씨를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그 부용에는 바로 음식만들기와 바느질하기가 포함되어, 안살림을 위한 일로 기본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관청의 여종이나 기생에게 바느질을 시키면 안된다. 부득이 남의 손을 빌려야 한다면 침비(針婢)를 부르거나 침가(針家)에 가져가서 삯을 주고 맡겨라.

-정약용, [목민심서]- 

 

정약용 선생의 언급은 관청 소속의 여인들에게 본연 임무가 아닌 사적인 일을 시키면 안된다는 것을 경계한것이다. 바느질감이 있거든 '침비'나 '침가'에 맡기도록 했다. 

 

침선을 담당하는 이는 원래 왕실의 의복을 담당하는 상의원 소속 노비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옷을 만든 이들이다. 이들은 바느질 재단 재봉 자수 다리미까지 도맡았어고, 장인으로 대우 받아서 '침선장(針線匠)' 이라고도 불렸다. 부잣집에서는 전속 침선비를 두어 의복의 제작과 관리를 맡겼다. 

 

침선비를 둘 수 없던 경우에는 침가(針家)를 이용했는데, 바로 삯바느질이다. 삯바느질은 가난한 양반 여성의 몫이었다. 

평민 여성이 아닌 이상 양반여성이 밖에 나가서 생계를 보태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으므로 가난한 양반 여성들은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삯바느질을 원했다. 가정에서 부공을 연마했던 여성들이 혼인 후에 삯바느질을 하게 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남편의 실직을 대비한 일종의 직업훈련이 아니었을까? 

 

책을 보는 것이 기본이었던 양반 남성들에 비하면 여성들은 유용한 기술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북학파의 핵심인물이었던 박제가의 [북학의]를 보면 홀로 남은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박제가의 공부를 뒷바라지했다고 나온다. 훌륭한 선생님이 있으면 돈을 아끼지 않고 묘서와서 가르쳐주셔서 실제로 가난한 줄도 몰랐다하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박제가는 회상했다고 한다.

 

'등불을 켜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새벽닭이 울도록 주무시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 삯바느질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장애인 여성도 삯바느질 덕택에 당당한 사회인으로 살아갔다. 

조수삼(趙手三)의 [추재기이(秋齋記異)]에는 손가락이 모두 붙어 물건을 쥘수 없는 여성이 등장한다. 선천적 '합지증'이었던 것 같다. 다행히 발가락이 가늘고 길어서 발을 손처럼 사용했다. 밖에 나갈 때는 손에 신발을 끼우고 물구나무를 서서 걸어나녔다. 이 때문에 '거꾸로 다니는 여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녀는 손으로도 놓기 어려운 자수를 발로 놓았다. 조수삼은 시를 지어 연민과 존경을 함께 표현했다. 

 

거꾸로 사는 인생도 고달플 텐데,

등불 앞에 앉아서 자수를 놓네. 

 

1970년-80년대까지만 해도 박제가의 어머니처럼 삯바느질로 자식공부를 뒷바라지한 어머니가 있었다. 

삯바느질은 자식의 공부는 물론 생계유지를 위한 존중받아야 할 노동이었다. 

 

 

삯바느질하는 여성 (송풍수월 블로그 참고)

 

 

6.25 전쟁때 나의 외조모께서는 제주도로 피난가셨었다. 그때를 회상하며 들려주셨던 이야기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다. 양반댁에서 곱게 사시던 분이 일제와 전란의 풍파속에 힘겨웠던 삶이었다. 8남매를 낳았으나, 남편도 일찍 세상을 떠나고 아이들도 모두 이른 나이에 죽어, 나의 어머니인 막내를 데리고 제주도로 피난가서 하실 수 있었던 일은 삯바느질이었다고 하셨다. 조선시대 부공을 열심히 갈고 닦아야 했던 여성의 삶을 그대로 보는 거 같았다. 그때 삯바느질을 맡겼던 사람들은 '육지 바느질은 역시 달라, 얌전하고 너무 솜씨가 좋으시다'라고 하며 많은 일감을 주어서 피란시절을 보냈다고 하셨다. 물론 아주 훗날 회상하시듯 말씀 하시던 외할머니는 이 세상에 안계시지만, 삯바느질의 이야기가 나오면, 외할머니의 바느질 솜씨도 기억나고, 곱게 빗어낸 양반댁 만두빗기 모습도 선연하게 그려진다. 

 

우리의 역사 속에 살아 숨쉬던 바느질.

이제 전통적인 바느질 솜씨를 잘 전수하는 이들은 '침선장' 으로 명명된다. 

침선장은 1988년 8월1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 처음은 나의 지도교수 친정 어머니셨던 정정완할머니셨다. 모두 작고하셨지만, 그 뒤를 이어 며느님(구혜자)께서 보유자로 무형문화재의 맥을 이어가고 있으시다. 지정 당시 할머니를 침선장으로 모시자는 의견에 대해 집안에서 의견이 분분했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또한 전통의 맥을 잇는다는 의미에 뜻을 모아 침선장으로 모시게 되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故 정정완 침선장

 

 

침선은 실을 꿰어 바느질로서 만들 수 있는 모든 복식이 포함된다.

옷을 말라서 바느질하는 봉제, 옷에 어울리는 무늬를 수놓는 자수, 옷에 곁들여 장식하기 위하여 만드는 장신구공예 등이다.  

 

 

지금은 한복의 아름다움과 그 멋을 세계로 알리는 일들에 많은이들이 앞장서고 있다. 이 시대는 핸드메이드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때가 되었다. 앞으로 한복의 아름다움을 비상시키는 '바느질'이 멋진 전통기술 공예로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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