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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의 기원과 상징성을 알아볼까요?

바짝이 2024. 4. 2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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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가까워 오면서 에어컨 바람이 당연한 것 처럼 생각하지만, 전통의 아름다움을 담은 부채를 들고 다니는 사람도 종종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도 생활에서 유지되고 있는 부채의 개념과 기원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과연 더위를 식히려고만 사용했던 것일까요?  

 

부채의 개념

 

부채의 한자어는 '선(扇)' 이다, 집이나 문을 뜻하는 '지게문 호(戶)'자에 날개를 뜻하는 '깃 우(羽)'자를 합해서 만들어진 글자다. 즉  '집 안에 있는 날개' 라는 뜻이다. 부채의 기원이 새의 깃털에 있다는 점을 말해 준다. 부채는 순 우리말로는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부치다'의 '부'자와 가는 대나무 또는 도구라는 뜻의 '채' 가 합쳐진 단어이다. 

 

'부채' 라는 용어가 기록된 문헌은 계림유사, 두시언해, 박통사언해 등이 있다. 이들 기록을 토대로 보면, 조선시대에 부채는 한자어 외에도 순우리말로도 언급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계림유사 : 1103년 중국 북송의 손목이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간 후 고려의 풍속과 제도 언어등을 기록한 전문록임
*두시언해 : 성종 21년(1481)에 중국 당나라 두보의 시를 우리말로 번역한 시집
*박통사언해 : 숙종3년(1677) 박통사 원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간행한 중국어 학습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 유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유물은 이집트 투탄카멘왕(B.C.1361-1352)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타조 깃털을 붙인 플라벨륨이다

어린이조선일보 사진 인용

 

우리나라에도 기원전 3-4세기 경에 부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도 있다. 가장 오래된 부채는 다호리유적에서 출토됐다. 사적 제327호인 다호리유적은 창원시 동읍 다호리의 편평한 구릉에 조성된 원삼국시대의 집단 묘역(墓域)이다.

당시에 이미 한나라와의 교역, 문자생활, 다양한 칠기류와 철기류 사용 등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으로서, 많은 유물 중 흑칠(黑漆)을 한 부채자루가 2점 확인되었다.

 

경인일보 사진 인용/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나온 부채자루. 깃털 꽂는 구멍 12개가 있다.

 

다호리 부채는 깃털부채(羽扇)로서, 제갈량이 지니고 조화를 부렸던 백우선(白羽扇)과 비슷한 형태다. 이런 깃털부채는 황해도 안악 3호분 벽화의 인물도에서도 보인다.

 

부채의 상징성

 

조선시대에 부채는 단오를 맞아 왕이 신하들에게 부채를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많이 알고 있듯이 이 부채를 단오선 이라고 한다. 

 

첫째, 부채는 왕의 은혜를 상징했다. 태종때부터 해마다 왕실에는 옷칠한 부채(접선)진상이 이루어졌다. 왕에게 진상된 부채는 품계에 따라 대신들, 지방의 수령들, 사대부들에게까지 차등을 두어 하사되었다. 조선왕조의 수직적 위계와 덕치주의 통치이념을 반영하였다. 

 

둘째, 부채는 외교선물이었다. 중국칙사들에게 선물용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에게 예단용으로 주는 대표적인 선물이었다. 15세기 초에는 조선의 부채 1자루 값이 중국의 황금2냥을 호가할 만큼 값진 공예품이었다. 조선초기부터 명나라에 가는 사행들은 중국 관원들에게 선사하고자 부채를 많이 가져갔다고 한다. 이는 세종실록 단종실록, 세조실록, 중종실록 등 실록에 명시되어 있다.

 

셋째, 부채는 사대부의 품격있는 멋을 상징하였다. 사대부들은 좋은 글귀나 그림으로 부채를 장식하여 휴대하면서 자신의 품격을 과시하였다. 오늘날 명품과 같은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정선의 독서여가도/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

 

 

장수경 석사학위논문(2024)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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