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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여성에게 남긴 것

바짝이 2024. 6. 2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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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유퀴즈 250회 방송에서 미국 국방부 법의인류학 진주현 박사가 출연하여, 전쟁 실종자들의 유해발굴작업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려주었다. 그 분의 전공과 이러한 일을 하게 된 배경도 보면서, 감동과 극적인 이끌림의 신비감 마저 들정도 였다. 전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6.25 전쟁 참전 용사다. 그리고 전장에서 부상을 당했고, 한쪽 눈 옆에 상처를 크게 입으셨는데, 그래서 늘 안경을 쓰고 다니셨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께서 눈이 안좋으신건가? 라고 생각했는데, 성장 후에 전쟁시 부상이야기를 듣고, 그 흉터를 가리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의용사로 국가유공자가 되셨지만, 우리 형제들에게는 국가유공자로서의 혜택을 모두 거부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국가유공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대학을 마치고 나서였다. 대학가기가 힘들었던 시기에 국가유공자 자녀는 혜택이 있었고, 이외에도 많은 혜택이 있던 것으로 아는데, 그것을 하나도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나'라고 서운해 하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신조는 달랐다. '나라를 위해 할 수 있었던 당연한 것을 했던 것이고, 목숨까지 바친 전우들도 있는데, 살아있다고 그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셨다. 

 

아버지께서는 나의 오빠에게도 반드시 정규입대해야한다고 하셨서 강원도 현리에서 군의관으로 3년을 복무했다. 그렇게 복무한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나라사랑이 각별하셨던 것은 전쟁을 겪은 아버지로서의 깨달음이 있으셨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돌아가신지도 오래 되었지만, 나의 외할머니께서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 전쟁은 없었으면 해.'라고 무서움에 가득차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난다.  제주도까지 피난을 가셔서 삯바느질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듣고, 어머니는 피난중에 할머니 모시고 제주도로 가서 전후 복학을 하지 못해 꿈을 접으셨던 이야기 까지...6.25전쟁으로 겪으셨을 할머니와 부모님 세대의 아픔을 구전을 통해서, 책을 통해서 라도 잊지 않으려 한다.

 

전쟁의 폭력성이 갖는 잔인함은 인간의 마지막을 상상이상으로 비참하게 만든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은 우리 가족에게도 아픔이었지만, 직접 겪지 않은 나는 다행이라할까? 전쟁 이후 70여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으니, 우리 세대는 우리땅에서 전쟁없이 잘 사는 행복한 세대임은 분명하니까. 전쟁을 겪고 이겨낸 세대들의 아픔과 극복의 힘으로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니까.  감사해야 한다.  

 


출처 : 뉴스민 / 피난

 

 

출처 : 시사IN / 한국전쟁 당시 부모와 헤어진 고아들 모습.

 

 

전사한 남편을 둔 여성을 높여 칭하는 '전쟁미망인' 이라는 용어에는 사실 남편을 따라서 죽지 못한 여성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1955년 조사에 의하면 당시 전체 미망인의 수는 100만여명에 이르며, 이 중 대다수가 전쟁미망인거나 이산으로 인해 남편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경우다. 이산가족은 월남인과 월북인 뿐만 아니라 잡치된 인물들, 미송환 포로, 미귀한 공작원 등과 유가족들이 포함된다. 이들 여성 이산가족과 함께 전쟁으로 불구가 되어 돌아온 남편까지 떠 맡은 여성들도 사실상 전쟁 미망인과 다르지 않았는데, 어느 경우에도 여성들의 고생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51년 피난민들에게는 1인당 하루 양곡 2홉 5작, 부식비 50환이 배급되었고, 피난증을 받은 월남인들은 양곡이나 밀가루, 안남미, 보리나 옥수수가루 등을 배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배급은 늘 부족했기 때문에 생계를 책임진 여성들은 가족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먹을거리를 마련해야 했다. 여성들은 풀과 나물, 해초, 심지어는 나무 껍지 등을 채취해 죽을 끓였고, 미군 부대 근처에서 쓰레기로 버려지는 음식물을 받아다가 양곡이나 국수 등과 함께 끓여 '꿀꿀이죽'을 만들기도 했다.

 

노동이나 행상, 품팔이, 삯바느질, 음식 장사 등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한 여성들의 경제적 투쟁은 전후 여성의 지위와 활동을 규정하는 우선 요인이었다. 

 

살기 위해 도시로 이동했거나 강제로 인신매매를 당한 여성 중에는 미군기지 주변의 기지촌에서 짙은 화장을 하고 미군을 기다리는 '순이'와 '에레나'들이 있었다. 전쟁 후 버려진 기지촌 여성들과 미군 혼혈아의 존재는 전쟁과 미군 주둔이 가져온 가장 가슴 아픔 장면의 하나이다. 

 

전쟁미망인, 이산가족 여성, 불구가 된 남편, 그리고 '양공주'라 불린 기지촌 여성들은 1950년대 결여된 가부장성을 홀로 지탱하며 곱지 않은 서회적 시선까지 견뎌야 했던 불안한 섹슈얼리티의 상징이었다. 

 

-한국현대생활문화사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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