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잘 사는 웰빙넷

k-생활사

한국 근대 여성의 삶과 위치는 어떠했는가?

바짝이 2024. 6. 26. 12:01
728x90
반응형

돌이켜 한국 여성의 삶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지금 여성의 지위와 역할, 삶에 대한 문제에 앞서

살펴보아야 하는 것으로,

그 한계와 문제를 인식하고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하다.


 

한국에서 1920년대부터 거론되기 시작한 여성해방론은 여성이 경제적으로 평등하고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자각을 바탕으로 했다. 그러나 식민지 현실에서 여성의 경제적 평등과 독립은 더욱 요원한 것처럼 보였다. 식민지하에서 근대로의 진입과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여성들에게 그 정체성을 독립적으로 꽃피우기보다는 정치세력과의 연대 속에서 이를 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제공했다. 

 

광복이후 미군의 점령은 여성들이 향후 국가 건설과정에 한몫함으로써 공적 영역에서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신장하는 데 주력할 수 있다는 전망을 가져다 주었다. 광복 바로 다음 날 일제 시기 좌우합작 여성단체인 근우회에서 활동한 선구적인 여성운동가인 황신덕, 박순천, 임영신, 노천명 등이 건국부텨동맹을 결성했다. 이들은 조선 여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해방을 위해 남녀평등의 선거 및 피선거권확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획득, 남녀 임금 차별 철폐, 공 사창제 및 인신매매 철폐, 여성의 자주적 경제생활과 문맹 미신 타파 등을 구체적인 행동강령으로 삼았다.

 

미군정기 여성정책은 기본적으로 남녀평등의 민주질서 확립이라는 목표를 전제로 추진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1946년 행정부 내에 여성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부녀국이 설치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미군 점령 후 공창제가 즉각 폐지된 일본에 비해 일본에서는 미군정이 이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임에 따라 1947년 11월에야 공창제 폐지령이 공포되고 사창은 도리어 증가했다. 한국전쟁 전 5만여 명이었던 공 사창 종사자가 전쟁 후에는 30여 만명으로 늘어난 것은 비대해진 군대조직과 미군의 주둔 외에도 이 같은 현실이 원인이 되었다. 미군정기에 우익 중심으로 재편된 여성운동은 여성해방을 위한 이념이 부재한 가운데 국가권력 기구와의 유착을 통해 대중과 유리된 여성 명사 중심의 운동에 그쳤다는 점에서 이후 의 여성운동과 같은 한계를 지닌다. 

 

미군정기에 이루어진 여성의 법적 지위 향상에서 가장 큰 변화는 여성참정권의 실현이었다. 1948년 3월 17일 법률175호로 공포된 '국회의원선거법'에서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자격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전체 유권자의 91.7%에 달하는 높은 등록율을 보인 제헌국회위원 선거에서 여성 유권자의 등록률이 전체의 49.4%에 그쳤다는 것은 아직 여성의 선거 참여가 국민들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여성후보자는 서울 7명을 포함해 총 18명이었지만 이 중 한명도 당선되지 못했다. 서구의 경우 여성참정권이 한 세기 이상 지난 투쟁의 과정에서 쟁취 된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여성 스스로도 참정권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출처 : 연합뉴스 / 1952년 8월 5일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하는 여성의 모습

 

 

정부수립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 동안 3명의 여성이 장관직에 진출했는데, 초대 상공부 장관 임영신, 공보처장 김활란, 무임소장관 박현숙이다. 이 때 부터 1979년 이화여대 명예총장 김옥길이 문교부장관이 되기 전까지 여성장관이 전혀 없었다. 이빡에도 미군정기 부녀국장을 역임한 고황경과 제2대, 4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박순천, 제 3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철안 등을 비롯해 장관이나 국회의원 및 정부 관료로 진출한 다수의 여성인사들은 모두 이승만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고학력의 우익단체 인사들이었다. 

 

여성이 고위직에 진출하는 등 성과를 올렸지만, 집합적 주체로서의 여성 단체 활동이나 역할은 공적 영역에서 오히려 축소되었다. 이른바 '낙랑구락구'로 불린 엘리트 여성들의 외교활동은 일종의 비공식적인 스캔들로 치부되어 공적 활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일제 강점기부터 국가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을 여성 지위 향상과 동일시 했던 엘리트 여성 지도자들의 한계이자, 여성을 정치적 동원 대상으로만 치부했던 이승만 정권의 한계이기도 했다. 실제로 1950년대 결성된 여성단체들의 활동은 정부의 헤게모니에 귀속된 관제 여성운동의 기원을 이루었다. 

 

낙랑구락부란? 

영어를 구사하는 엘리트 여성들이 외교관 및 고급 장교 등 주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외교활동을 한 비밀 사교단체이다. 총재 김활란과 회장 모윤숙 등 낙랑구락부의 핵심 인사들은 외교력을 발휘해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하던 유엔한국위원단 임시의장 메넌 대사로 하여금 이승만을 지지하고 남한 단독정부를 찬성한다는 연설을 하도록 만드는데 일조했다. 

 

-한국현대생활문화사,1950년대-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