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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역사 빛과 그림자(고구려~고려)

바짝이 2024. 6. 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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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시대의 궁궐은 깊고 깊은 지존의 내밀한 처소며, 나라의 일과 사건이 점철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이 땅에 살던 백성들에게 임금이 살고 있는 대궐은 존엄과 숭앙의 대상이었으며, 대궐을 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청와대의 개방 이후, 그간 대통령이 기거하며 정사를 돌보던 상징성을 누구나 방문해서 살펴볼 수 있다는데에 의미를 두고, 많은 관람객으로 붐빈다. 제자가 문화재청에 근무하면서 청와대탐방 업무를 보고 있어, 학생들과 견학을 다녀온 경험이 엊그제 일 같다. 

 

그러면 우리 역사에서 궁궐은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어떤 빛과 그림자를 갖고 있었을까?

 

출처 : 한겨레


 

궁궐은 당대 최고의 석공 목공들이 지었으며, 숱한 전과 각과 문은 치밀하게 계획된 공간그성으로 이루어졌다. 나무 하나 돌계단 하나에도 심오한 의미와 상징을 부여했다. 단순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암시의 심오한 의미를 지닌 상징의 세계가 곧 전체의 궁궐로 탄생했다. 그러한 신비한 표상을 읽어내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읽는 셈이다. 

 

궁궐은 왕조시대 영광과 기쁨, 치욕과 반전을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다. 기뻐하고 경하할 일도 있었고 슬픔에 찬 눈물을 머금었던 때도 있었다. 임금이 등극하기도하고 쫒겨나기도 했다. 전란과 화재로 무수한 전각이 불타고 다시 고통에 찬 작업으로 재건한 그 기나긴 과정이 궁궐의 숱한 전각과 각종 문에 배여있다. 

 

궁궐이란 용어는 궁(宮)과 궐(闕)의 합성어로 궁이란 천자나 제왕, 왕족들이 사는 규모가 큰 건물을 의미하고, 궐이란 본래 궁의 출입문 좌우에 설치된 망루를 지칭하는 것으로 제왕이 살고 있는 건축물이 병존하고 있어서 궁궐이라 일컫게 되었다. 

 

궁의 공간은 관청들이 배치되는 외조공간(外朝空間), 왕이 정치를 하는 치조 공간(治朝空簡), 왕과 왕비 등이 생활하는 연조 공간(燕朝空簡), 휴식과 수학, 연회하는 유원 공간(囿苑空簡)으로 구성된다. 이들 네 공간은 시대와 지형상의 차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한 궁장구역 안에서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건물과 건물사이가 단절되지 않도록 구성되었다. 배치형식은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정사를 목적으로 하는 건물들을 앞에 배채시키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건물들을 뒤에 배치하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배치형식에 통례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배치법은 중국 일본의 궁궐배체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된 방법이다. 

 

 궁궐요소에는 궁궐을 둘러싸는 방형이나 장방형의 외벽 설비가 있었고, 이 외벽은 높고 넓은 석담이나 토담으로 둘러쳐져 있으며, 외벽의 네 곳에 궁문을 설치했다. 조선시대 이전의 궁궐은 지상건축물이 현존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문헌에 나타난 궁궐의 관계자료와 그들 유지에서 밝혀진 조사내용을 통해서 당시의 궁궐의 실상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구려의 궁궐은 만주 통구의 국내성과 평양의 안학궁 터에서 그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내성은 일부 초석이나 기와 조각만으로는 궁궐자리를 알 수 없고, 평양의 안학궁은 근년 발굴된 조사내용으로 배치 형식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궁궐에 대한 기록이 동명성왕-유리왕-봉상왕-광개토왕-평원왕조에 보이고 있으며, 그 기록은 궁궐과 이궁을 건설하거나 증축 수리하였다는 내용이다. 봉상왕조에는 특히 '임금이란 백성이 우러러보는 바이니, 궁전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못하면 어떻게 위엄을 보일 수 있겠는가'라는 구절이 있어 궁궐의 규모와 내용이 장업하고 화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삼국사기]에 온조왕 15년 B.C4세기경 한도에 세웠던 신궁이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를 보건대 백제 초창기 궁궐은 소박하였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진사왕7년(391)에는 궁전을 수리하고 연못을 파서 그 속에 산을 만들고 기이한 금수와 초목을 길렀다는 내용을 보면, 그 당시 궁궐의 화려함과 조경술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웅진으로 천도 후에는 궁궐 동쪽에 임류각을 지었는데, 그 높이가 50여척이었다고 하고, 연못을 파고 기이한 새들을 기르게 하므로 신하들이 상소로 항의하였으나 왕은 회답하지 않고 오히려 궁문을 닫기까지 하였다는 것을 보면, 궁궐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성왕16년(538)에는 사비(오늘의 부여)로 수도를 옮겼는데, 도성에는 사비궁, 망해궁, 황화궁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그 실상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무왕 35년(634) '궁궐 남쪽에 땅을 파고 20여리의 거리에 물을 끌어들이고 연못 연안에는 나무를 심었으며, 못 안에는 섬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통하여 백제의 궁궐도 고구려의 궁궐에 못지 않게 권위와 장엄함, 그리고 호사함을 갖춘 궁궐이었다 하겠다. 

 

신라

 

남북국시대의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국가답게 더욱 융성하게 발전되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 14년(674)에 '궁내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귀한 동물을 길렀다'고 하며, 679년에는 궁궐을 증수하였는데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만들어진 궁궐들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궁궐터로 확인된 것은 1975년 발굴 조사된 안압지 주변 유적뿐이다. 안압지 주변 건물터에서는 총 30개소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건물의 배치는 남북 중심축을 기준으로 하여 좌우 대칭의 배치 형식인데, 연못변의 건물터는 연못과의 조화를 위하여 다소 대칭을 변형시키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궁궐배치의 좌우대칭 기본형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고려

 

[고려도경]에 의하면 궁궐은 송악에 의지하여 고목이 우거져 악묘나 산사에 가까운 감이 있고, 담담한 아름다움이 있으며, 또한 궁성 주위에는 13개의 문이 있어 광화문이 정동의 문으로 긴거리에 통하고 있으며, 전문은 15개인데 신봉문이 가장 화려하고 외전의 중심건물인 회경전을 비롯하여 장화전, 원덕전 등이 있다. 만월대의 궁궐특징은 평지가 아닌 구릉지대에 건물을 배치한 점이며, 궁궐의 중심이 되는 외전 내전 침전 등의 건물군이 남북의 동일 중심축에 배치되지 않은 점이다. 즉 회경전을 중심으로 한 외전 일곽과 장화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 일곽 및 뒤편의 침전 일곽이 지형에 맞추어 축을 달리한다. 각 건물에는 단청이 되어 있고, 구리로 꽃무늬를 만들어 웅장하고 화려하였다고 한다. 후원의 조경도 괴석을 모아 선산을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샘과 연못을 만들었으며, 아름다운 꽃과 기이한 나무를 심어 매우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 

 

-우리의 옛문화와 소통하기- 중에서

 

궁궐에서 삶을 향유한 이가 있고,

그의 기록이 한줄이라도 남아 있더라도

궁궐을 지은 이들의 땀과 피는 어디서 기억되는가?

 

세상은 빛으로 기억되는 이가 있지만,

빛은 어둠이 있을 때 더욱 빛나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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