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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름

바짝이 2024. 3. 4.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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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공인중개사 시험은 2024년 올해 35회로 진행됩니다. 

시험은 국토교통부에서 주관하고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시행하는 국가자격시험으로

 

부동산 중개업을

건전하게 지도, 육성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부동산 거래질서를 확립하여

국민경제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시행합니다.

 

시험은 매년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실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렇듯이 전문 국가자격으로

어렵게 자격을 취득해야만

 

부동산중개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어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답니다. 

 

집주름[가쾌(家儈), 사쾌(舍儈)]은 
조선시대의 부동산 중개업자



18세기 중반으로 자리 잡은 직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753년 [영조실록]기사에는

부마도위(왕의 사위)의 후손 윤성동이

집주름으로 전락한 사실이 소개되었는데,

그를 무뢰배라고 할 정도로

집주름의 이미지는 부정적이었습니다.

 

 

박지원도 [마장전]에서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으로

말 거간꾼(마장)과 집주름을 거론했고,

[광문자전]에서 표철주가 가난해져

할 일이 없어지자 선택한 직업으로 묘사했습니다. 

 

 

1792년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신택권의 [성시전도시]에는

집주름이 큰집 작은집 할 것 없이 거래를 성사시키고,

 

한 집이 이사하면 열집이 움직이니 짐을 나르고 말에다 싣는 노비가

끝이 없었다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한양의 부유층이 몰려 있는 청계천 북쪽 일대 북촌(北村)은 물론

몰락한 양반들과 선비들이 모여 사는 남촌(南村),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종로 주변 외진 골목과 시장 주변의 집까지

거래 대상으로 삼은 듯하다고 합니다. 

 

 

집주름의 수입, 즉 중개 수수료는 어느정도 였을까요?

신택권은 [성시전도시]에서

"천 냥을 매매하고 백 냥을 값으로 받으니"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로 미루어 집주름의 중개 수수료는 거래가의 10%라는 셈이지요. 

 

 

1922년 <동아일보> 기사에 보면,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는 집주름은 600명 이상이고

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이익집단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서울에서 꽤 성행한 직업인 집주름은

일제 강점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결국 복덕방에게 그 역할을 물려주게 되었습니다. 

 

뉴스포스트 사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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