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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생활사

전쟁 후의 여성 문화, 그리고 계

바짝이 2024. 7. 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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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의 생활사에서 여성문화를 계속 살펴보기로 합니다. 전후 여성들의 처절했던 삶의 현장을 알 수있습니다. 경제활동을 위해 계를 조직했고, 그 영향력이 어떠했는지도 눈여겨 볼 픽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현재 여성들의 경제활동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결혼할 때 남녀 모두 맞벌이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만, 우리의 생활사속에서 여성 경제활동은 어떠했을까요?  


 

1950년대는 여성이 삶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다양한 지위를 갖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바로 '아프레걸'이다. 

 

아프레걸이란 프랑스어의 아프레게르에서 온 말로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전후의 새로운 여성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주로 미국문화를 모방하며 방종하는 여성을 비판하기 위해 쓰였다. 

 

전후에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여성들은 여대생, 취업여성, '양공주', '유한마담' 등이었다. 이중 지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여대생은 대단히 매혹적인 존재였다. 1950년대 교육의 양적 증대로 인해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여성의 숫자는 늘었지만, 여성의 대학 진학이 아직 보편화되지 못한 사정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다. 

 

1950년대 초 1만명도 안되던 대학생이 1950년대 말에는 10만명으로 증가했지만 그 중 여학생의 비율은 높지 않았다. 이화 숙명 덕성 등 일제 시기 명문 여학원들이 해방 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남녀 공학 대학교에도 여성이 입학하기 시작하면서 여대생은 현대적 '애티튜드'와 지성을 갖춘 여성으로 표상되었다. 그러나 동시대 남자 대학생들이 지식인으로 인식된 반면 여대생들은 그렇지 못했다. 1950년대 영화에서 여대생은 '낮에는 대학에 다니다 밤에는 술집에 나가는'여성으로 묘사되기 일수였다. '낙랑구락부'의 예에서도 보이듯이 여성들은 엘리트라고 하더라도 빈번히 성적인 것과 결합해 상상된 것이다. 

 

1950년대 영화에서 취업 여성은 현대적인 매너와 지성의 소유자로 묘사되었다. 이들은 타이피스트나 산부인과 의사, 양품점 매니저 등 나름의 전문성과 책임의식을 가진 여성으로서 남성중심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 였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이념이나 논리는 부재했다. 한편 전쟁과 미군 주둔의 부산물인 '양공주'는 기생적인 존재로서 멸시받았다. 영화속에서 이들은 기구한 과거를 지닌 탓에 스스로 타락했거나 주변 남성을 타락시키는 악녀의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생활이 넉넉해 여가를 즐기는 중산층 연성을 가리키는 '유한마담'중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댄스홀에 드나들며 가정을 등한시하는 '자유부인'들이 많았다. 1950년대 사회문제로 야기된 댄스홀과 춤바람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이 새로운 '부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사회적 스캔들이었고, 그 정점에 '박인수 사건'이 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비난의 초점이 된 것은 70여 명의 여성들을 기만한 남성이 아니라 피해 여성들이었다. 박인수가 상대한 여성들 중에 여대생과 고위 관료의 부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는 보도는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엇고, 이사건은 "법은 보호 받을 자격이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라는 법원 판결로 일단락되었다. 정절, 순결, 이데올로기가 여성들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성의식 변화에 맞서 승리한 것이다. 

 

당시 여성들은 무엇으로 불리고 어떤 사회적 조건에 처했든 간에, 가부장제 수호와 가족질서의 안녕을 일차적 목표로 삼길 강요하는 굴레 속에서 조금씩 숨통을 튀울 일들을 찾았다. 여성들이 전통적 성역할에서 어느정도 벗어나게 된 것은 전쟁과 전후의 팍팍한 삶으로 인해 여성들이 생활전선의 전면에 나서게 되면서부터였다. 삯바느질이나 행상 등을 통해 생계를 꾸린 억척스런 여성들만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전업주부나 부녀자들, '유한마담'들 역시 나름대로의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다. 

 

1950년대 영화에는 '유한마담'이 밀수에 손을 대거나 원조품을 불하받아 사업하는 데에 간여했다가 사기를 당하는 장면이 많다. 영화 [자유부인](1956년)에서 주인공 오선영의 친구 최윤주는 오선영을 댄스홀로 이끄는 인물이자 곗돈을 유용해 밀수 사업에 손을 대는 불법 사업가이기도 하다. 본래 유명 인사의 부인인 그녀는 사기를 당해 모든 돈을 날릴 뿐 아니라 언론에 노출되어 망신까지 당해 결국 자살하고 마는데, 이는 '유한마담'에 대한 당시의 통념이기도 하지만 어느정도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유한마담'이 부녀자들을 모아 계를 조직해서 자본을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요릿집 등을 경영하는 모습은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유한마담'뿐 아니라 당시를 살았던 부녀자들이라면 대부분 크고 작은 계 한두개씩은 하고 있었다. 이처럼 계는 오늘날의 재테크에 해당하는 경제활동 중에서도 독보적 위상을 갖고 있었다. 

 

영화 [미망인]과 [자유뷰인]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은 2년 후 한형모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유교 윤리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유부녀의 탈선과 성개방이라는 파격적인 목소리를 담은 이 영화는 한국 멜로 영화 최초의 히트작으로서 이후 수차례 걸쳐 리바이벌되었다. 한국 최초의 여류감독 박남옥의 데뷔작으로 주목받았던 [미망인] 역시 전후 성윤리의 변화상을 섬세하게 그려내 극찬을 받았다. 

 

출처 : 조선일보/ 대한민국 제1호 최초의 베스트셀러, 정비석의 [자유부인]

 

 

전통시대부터 사교와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계는 1950년대에 서민 금융을 대신하는 대표적인 공동체 조직이었다. 계는 은행 예금보다 높은 이자를 자랑했으며, 당시 농민과 소규모 기업을 상대로 불법적으로 자행된 고리대보다 접근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부녀자들은 소규모의 경제공동체인  계를 통해 소액의 자금을 불려나가면서 목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모인 곗돈은 자녀의 교육자금이나 집값으로 쓰이거나 각종 생활용품 또는 금반지 등의 사치품을 마련하기 위한 자금으로 쓰였다. 하지만 이 돈이 '유한마담'의 계주를 통해 시중으로 흘러나가고 계주가 곗돈을 들고 도망가거나 계가 파탄나는 일이 많아지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전쟁 후 사금융 시장 전체를 장악할 정도로 성행했던 계는 1953년 7000여 개에 이르렀는데, 이해 후반부터 정부의 통화 억제정책으로 자금융통이 원활하지 않게 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1955년 1월 광주를 시작으로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서 조직된 계의 대부분이 연쇄적으로 파탄났고, 계로 인한 살인이나 자살 사건도 급증했다. 계의 파탄에는 통화정책에 실패한 국가의 책임이 컸음에도 오히려 실질적인 피해자인 계원들, 즉 부녀자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사업이나 계 등 여성들의 경제활동은 '치맛바람' '배금주의' 등의 용어와 결합해 경제자립을 위한 여성들의 활동 자체를 부정적으로 담론화하는 빌미로 작용했다. 그러나 1950년대 여성들은 이러한 경제활동을 통해 고정된 성역할에서 벗어나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고 미래를 위해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첫번째 세대였다. 

 

보수적인 남성 지식인들은 여성의식과 세태, 풍속의 변화를 미국문화탓으로 돌리기도 했는데, 이는 어떤 측면에선 일부 타당한 것이었다.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훨씬 개방적이고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한국현대생활문화사]1950년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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